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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맥퀸? 내가 만들었어

천재를 발굴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그냥 알아보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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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수많은 천재를 세상에 알렸지만, 정작 자신을 설명할 단 하나의 이름은 끝내 찾지 못했던 이사벨라 블로우. 패션 에디터와 스타일리스트, 브랜드 컨설턴트 등 그녀는 여러 직함 사이를 오갔지만 어느 하나에도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누구보다 뛰어난 안목으로 시대를 바꿀 인물들을 발견했지만, 정작 자신을 규정할 자리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다.

기상천외한 모자와 극적인 실루엣,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차림새. 이사벨라 블로우는 그 자체로 패션의 아이콘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진짜 재능은 옷을 입는 방식과 태도보다, 사람을 알아보는 감각에 있었다. 알렉산더 맥퀸, 필립 트레이시, 후세인 샬라얀 등 훗날 패션사를 바꾼 그들은 모두 이사벨라에게서 먼저 발견됐다.

1992년, ‘리 맥퀸’이라는 이름으로 졸업을 앞두고 있던 알렉산더 맥퀸은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에서 졸업 컬렉션 <잭 더 리퍼가 희생자를 쫓는다>를 선보였다. 살인마 잭 더 리퍼에서 착안한 이 컬렉션의 쇼에는 피를 묻힌 모델들과 해체적인 테일러링, 폭력과 아름다움이 뒤엉킨 이미지로 가득했다. 모두가 억지로 박수를 치고 있을 때, 이사벨라 블로우만이 그 안에서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천재를 발견했다.

졸업 컬렉션 중 코트 한 벌을 350파운드에 팔 생각이었던 맥퀸. 이사벨라는 그에게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컬렉션 전체를 5천 파운드(한화 약 1천만 원)에 구매하겠다는 것이었다. 훗날 맥퀸은 ‘그녀가 누군지도 몰랐다’고 회상했지만, 그 만남은 리 알렉산더 맥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사실 이사벨라는 후원자가 될 형편이 아니었다.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집안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기 때문. 결국 그녀는 5천 파운드를 일시불로 줄 수 없었기에 매주 분할 납부로 맥퀸에게 돈을 건넸다. 그의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브랜드를 준비하던 맥퀸에게 ‘리(Lee)’보다 중간 이름인 ‘알렉산더(Alexander)’를 사용하는 편이 훨씬 품격 있는 이름이 될 것이라고 조언한 사람 역시 이사벨라였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알렉산더 맥퀸’이라는 이름에도 그녀의 감각이 스며있는 셈이다.

“천재를 발굴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그냥 알아보면 되니까.” – 이사벨라 블로우

그러나 사람을 알아보는 감각과 자신이 머물 자리를 찾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영국 보그와 선데이 타임즈에서 에디터로, 스와로브스키 등의 브랜드에서 컨설턴트로 활동했지만, 그녀는 어느 순간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 안에서조차 자신의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맥퀸이 브랜드를 구찌 그룹에 매각하고, 이후 지방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향하는 과정에서도 이사벨라는 함께하지 못했다. 가장 먼저 그의 재능을 믿었던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는 이사벨라 블로우의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았더라면 이사벨라는 자존감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존중과 애정을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쏟아부었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 그녀의 친구 대프니 기네스

2007년, 수차례의 자살 시도 끝에 이사벨라 블로우는 세상을 떠났다. 독극물을 마시고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조차 병원복 대신 은빛 라메 셔츠를 입겠다고 고집했다.

“내가 언제 패션 때문에 불편한 걸 신경 쓴 적이 있었어?”

이 사건으로 인해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던 알렉산더 맥퀸. 이후 그는 지방시 SS08 컬렉션 쇼 ‘라 담 블루(La Dame Bleue)’를 통해 이사벨라 블로우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생전 그녀가 사랑했던 알렉산더 맥퀸의 옷과 필립 트레이시의 헤드피스가 쇼를 위해 새롭게 제작됐고, 쇼장에는 그녀가 즐겨 사용했던 향수가 은은하게 퍼졌다.

그녀가 남긴 것은 브랜드도, 컬렉션도 아니었다. 사람을 알아보는 감각, 그리고 그 감각이 바꾸어 놓은 수많은 순간들이었다. 결국 이사벨라 블로우는 디자이너도, 디렉터도 아니었다. 다만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가능성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끝내 자신을 설명할 단 하나의 이름은 찾지 못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이사벨라 블로우라는 인물을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게 만드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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