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빠른 콘텐츠에 익숙해진 우리는 두 시간짜리 영화조차 지루하게 느낄 때가 있다. 그러다 눈이 스르륵 감길 즈음, 로맨스 영화 속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직접 구매하고, 펼치고, 한 페이지씩 넘겨야 하는 책은 어떤가? 준비 과정부터 번거롭게 느껴진다. 그런데 활자를 따라가다 중간중간 도파민을 자극하는 장면들이 숨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9금 소설’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이유다.
나만의 취향인 줄 알았더니, 해외에서는 이미 19금 소설의 인기가 엄청나다. 19금 소설만 읽는 독서 모임도 생기고 있기 때문.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이 만든 야한 소설 독서 모임 <다윗 칼라지 스멋 소사이어티(Darwin College Smut Society)> 창립자는 이렇게 말한다.
“다들 몰래 읽고 있지만, 굳이 말하지 않을 뿐이에요. 이 취향을 함께 나누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었어요”
이곳에서는 <야한 소설 빙고 게임> 같은 독특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19금 소설책을 훑어보고 맘에 드는 구절을 빙고 카드에서 채워 넣는 방식이다. 19금 빙고인 만큼 카드에 적힌 수위 역시 상당하다. ‘증오심 가득한 섹스’, ‘체액’ 같은 문구가 오간다. 게임에서 이기면 19금 소설책 한 권이 상품으로 주어지니, 부끄러움은 잠시 내려놓는다.
런던 스피탈필즈에 있는 로맨스 소설 전문 서점 <메인 캐릭터>에서도 매달 19금 소설 독서 모임과 자극적인 책 읽기 오픈 마이크 행사를 진행한다. 토론토의 로맨스 전문 서점 <로맨틱> 역시 현대 로맨스, 다크 앤 스파이시, 퀴어, 로맨스 총 4가지 19금 분야의 독서 모임을 운영 중이다.
빠르게 확산 중인 19금 소설 열풍.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같이 읽기’가 조금 민망하다. 그래서 준비했다. 이불 속에서 혼자 숨어서 읽기 좋은, 자극적인 19금 소설 5권. 취향에 따라 골라 읽어보자.
❶ 막장 드라마 뺨친다 –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살아 움직이고 뜨끈하고 물컹하고 꿈틀거리는 느낌의 소설.”

영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원작 소설>. 이 작품은 인간의 성적 욕망과 감정을 ‘요리’로 풀어낸다. 가문의 전통에 묶여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주인공 티타, 그리고 그녀의 곁에 남기 위해 티타의 언니 로사우라와 결혼한 페드로. 꼬인 관계 속에서 억눌린 감정이 점점 끓어오르는 소설이다. 12개의 목차로 1월부터 12월까지, 매월 티타가 만드는 하나의 요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기서 나오는 티타의 음식은 단순한 요리가 아니다. 음식에 그녀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먹는 이에게 그대로 전염되는 것. 두 남녀의 애절한 사랑을 요리책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빌려 관능적으로 풀어낸 것이 특징.
❷ 불닭볶음면 같은 남자 VS 능이 백숙 같은 남자 – 인터메초 (샐리 루니)
“인물들에게 질릴 것만 같은데 페이지는 계속 넘어간다.”

영화 평론가 이동진이 이달의 책으로 선정했다.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두 형제의 이야기.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슬픔에 빠진 두 형제 피터와 아이반이 삶에서 겪는 사랑과 관계의 변화를 다뤘다. 성공한 변호사이자 형 피타는 연하의 학생 실비아와 사랑에 빠져 불안정한 관계에 기대고, 사회성이 부족한 천재 체스 선수 아이반은 열네 살 연상 마거릿과 복잡한 감정을 나눈다. 두 형제가 삶에서 느끼는 내면의 외로움, 집착 등 미묘한 감정들까지 세세하게 표현해 그 몰입도가 배가 된다.
❸ 남의 삶을 훔쳐보는 건 언제나 짜릿하다 – 지옥 (앙리 바르뷔스)
“흥분에 도파민이 나올지라도 도덕과 양심을 배반하며 옆방을 엿보고 있는 내 방이 곧 지옥인 것이다.“

하숙집 방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타인의 삶을 몰래 훔쳐보는 청년 르 메르시. 갓 성에 눈뜬 남녀의 어설픈 탐닉부터 동성 연인들의 몸짓, 불륜을 저지른 아내와 하녀의 몸을 더듬는 남편 사이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느끼는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 그리고 억눌렸던 욕망에 대한 생각들을 담아냈다.
❹ 가보지도 않은 여름날 이탈리아가 그리워지는 책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안드레 애치먼)
“결말까지 완벽했다. 그 계절에 머물러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사랑도 있다.”

티모시 샬라메가 주연인 영화로 더 많이 알려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원작 소설. 북부 이탈리아의 한 여름, 열일곱 살 엘리오와 스물네 살 올리버 두 남자의 사랑을 섬세하게 그려 냈다. 특정 관계에 집중하기보단 결국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첫사랑이 가진 뜨거움과 함께 있는 순간, 내일이 없는 것처럼 서로를 갈망하는 감정을 밀도 있게 담아낸다. 2007년 출간 당시 ‘람다 문학상 게이 소설 부문’을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극찬을 받았다.
❺ 영화 <은교>가 생각난다 –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근래 읽은 최고의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언어로 무자비하게 성희롱 당하는 느낌.”

중년 남성 험버트는 과거의 첫사랑을 한 14살 소녀에게서 다시 발견한다. 그가 어린 시절 잃은 연인 애너벨 의 모습이 셋집 주인의 어린 딸 롤리타의 모습에서 겹쳐 보인 것. 그렇게 시작된 열네 살 소녀에 대한 집착을 파고든다. 이 관계는 분명히 잘못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그들의 관계 속으로 끌어당기는 나보코프의 문장은 위험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래서 더 불편하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