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 사람도 ‘무라카미 하루키 정도’는 안다. 아니, 오히려 소설을 별로 읽지 않는 요즘 사람들을 독서의 세계로 끌어들인 작가에 가깝다.
10대 소년, 소녀들에게 독서의 재미를 맛보게 해준 그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이 그 이유일 터. 우리가 좋아하는 비틀즈, 불완전한 인간, 읽기 쉽고 간결한 문장들. 결정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여운이 남는 중2병스러운 문체가 10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글쟁이, 문학쟁이들에게 ‘너무 대중적’인 그의 명성은 기피의 대상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마치 진짜 소설에 다가가지 못한 사람이라는 듯 은근히 얕잡아 보는 분위기가 있다. 록 음악에 미쳐 있는 사람에게 ‘너바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겉핥기만 해본 놈이라고 으스대는 그런 바이브다.
그 은근한 멸시를 무시하지 못한 나는 새로운 작가를 찾아 나섰다. 그런 놈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무라카미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작가를 찾고 나서 희열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무라카미 중 하루키 말고 류가 좋더라.” 그렇게 말하고 싶어 안달 난 허영심 가득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무라카미 류 역시 당대 ‘투 무라카미’라며 무라카미 하루키에 필적하는 스타 작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야 겸손해졌다.
나처럼, 또 다른 무라카미로 으름장 한번 놓고 싶은 인간이 있다면 무라카미 류에 대해 알아보는 게 꽤나 도움이 될 터. 친구들과 대화중 소설 이야기가 나온다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닌 무라카미 류를 툭 던져보자. 일본의 허름한 바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위스키 잔을 기울이며 게슴츠레 눈을 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 말고, 류
단순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안으로 그를 떠올리는 일은 책 한 권만 읽어도 생각이 바뀔 것이다. 1976년, 그는 24살이었다. 무라카미 류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데뷔작부터 성공 가도를 달렸다. 혈기 어린 나이 탓인지 첫 작품부터 강렬했다. 미군 기지 주변에서 마약과 섹스, 폭력에 잠식되어 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벌거벗기듯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적나라하게 표현’이란, 단순히 과감한 문장을 툭 던지는 것 이상의 ‘이미지’를 나열한다는 뜻이다. 읽기만 해도 한편의 영화를 자연스럽게 보는 듯한 감정을 느낄 터.

그렇다고 무라카미 류가 단순히 어두운 상황을 그리는 작가는 아니다. 그의 작품에는 ‘시대’가 있다.
실제 미군 기지 주변에서 성장기를 보냈던 무라카미 류는 록 음악, 영화, 마약, 성적인 콘텐츠 등 미국 문화와 가까운 매일을 살았다. 가끔 학생 운동에도 참여했지만, 도파민을 채워줄 하나의 이벤트였을 뿐, 사회 개혁에 진심이라기보다 젊음이 가진 흥분과 에너지에 더 가까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버블 시대, 그 이면을 집중했다
일본은 전 세계 경제력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무라카미 류는 자신의 성장과 일본의 성장을 동시에 경험한 세대다. 그의 눈은 소비주의, 물질 만능주의, 청년 세대의 무기력 등 경제적 성공이 일본인들의 행복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렇게 그는 화려한 일본 이면에 사회 부적응자들에 집중했다. 뉴스에서 문제거리라고 일컫는 이들이었지만, 류는 그들을 진짜 일본의 현실을 보여주는 존재로 묘사했다.

하루키와의 차이는 여기서 나타난다. 당시 일본의 기저에는 미국 문화를 우상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음악은 물론 패션에서도 마찬가지. ‘아메카지, 복각’ 같은 키워드가 이때 등장한 것은 가장 강력한 증거일 터.
투 무라카미 모두 미국 문화와 함께했다. 하루키가 재즈와 위스키, 레코드판 너머의 낭만을 소설에 담았다면, 류는 록 음악 같은 반문화를 통해 미국 문화가 바꿔버린 일본의 현실을 바라봤다.
투 메인스트림(Too Mainstream)이라며 무라카미 하루키를 피해 찾은 무라카미 류. 그의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세상을 조금 더 날카롭게 바라보는 인간이 된 듯한 허영심을 가득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루키보다 덜 유명하거나 덜 대중적인 작가가 아니었다. 일본의 초호화 시대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대작가였음을 깨닫고 나서야 그 착각에서 빠질 수 있다.
코스피 8000, 우리도 마찬가지다
수년간 2000~3000선을 왔다 갔다 하던 코스피가 어느새 3배 이상의 상승으로 박스권을 뚫어버렸다.
주식으로 돈을 번 사람, SK하이닉스에서 두둑한 성과금을 받은 사람 등 주위에서는 돈에 관련된 희소식이 마구 들려온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그 때문이었다. 최근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분위기가 어딘가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승장이 만들어낸 인간의 욕망, 우리는 희소식을 들으면서 더욱 돈에 매몰되어 가고 있다. 상승장은 늘 사람들에게 특별한 착각을 선물한다. 세상의 흐름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읽고 있다는 확신, 남들이 보지 못한 미래를 먼저 발견했다는 우월감. 무라카미 류의 작품을 처음 읽고 세상을 조금 더 날카롭게 바라보게 됐다고 착각했던 나처럼 말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버블 경제 한가운데 있던 무라카미 류의 인물들과 닮아 있다. 시대를 읽고 있다고 믿지만, 어쩌면 욕망에 휩쓸리고 있을 뿐인 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류가 바라봤던 것은 경제가 아니라 욕망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욕망은 바다를 건너 코스피 차트 위를 배회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