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래 알던 아이돌의 목소리가 아니다. 최근 K-pop을 듣다 보면 이전에는 쉽게 들을 수 없었던 낯선 소리가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매끈하고 정직하게 들리던 보컬은 어딘가 뒤틀려 있고, 과하게 높아진 음정과 인공적인 이펙트는 일본의 ‘보컬로이드’가 떠오르기도 한다.
사실 이런 방식의 보컬 프로세싱이나 과격한 전자음이 국내 음악씬에서 완전히 낯선 것은 아니다. 특히 힙합에서는 이미 여러 방식으로 활용돼왔다. 하지만 대중적인 아이돌 음악의 한가운데에서 이 같은 소리가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꽤 흥미롭다. 익숙한 공식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일부러 낯선 질감을 끌어오는 것. 요즘 K-pop이 향하는 방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이유다.

하이퍼팝, 그래서 뭔데
음악씬에서는 이런 흐름을 흔히 ‘하이퍼팝’이라는 이름으로 묶는다. 2010년대 중반 PC 음악을 중심으로 등장한 실험적인 팝에서 출발한 이 장르는 기존 팝의 문법을 극단적으로 확대하고 뒤틀었다.
강렬한 전자음과 왜곡된 보컬, 과도한 피치 변조, 글리치 사운드가 대표적인 특징이다. 신스와 디지털 노이즈가 뒤섞인 독특한 질감에서는 2000년대 인터넷과 게임, 애니메이션 등 서브컬처의 흔적도 발견된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익숙한 팝을 디지털 기술로 과장하고 변형한 음악. 처음 들으면 다소 기괴하지만, 한번 익숙해지고 나면 오히려 그 과장된 소리가 장르의 매력으로 다가온다.

국내에도 이미 있었다
래퍼이자 싱어송라이터 에피(Effie)의 파급력은 강렬했다. 2020년 싱글 [Highway]로 데뷔한 그녀는 이듬해 EP [Neon Genesis]를 발표하며 하이퍼팝과 트랩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다.
과장된 보컬과 날카로운 전자음은 당시 국내 대중음악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질감이었다. 이후에도 장르의 경계를 두지 않고 다양한 사운드를 선보이며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 온 에피. 2021년에는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랩&힙합-신인’ 부문을 수상하며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줬다. 국내에 하이퍼팝이라는 장르를 알리는 데 에피가 남긴 공은 결코 작지 않았다.
즉, 하이퍼팝은 K-pop에 갑자기 등장한 유행이라기보다 이미 국내 음악씬에서 조금씩 자리를 넓혀오던 흐름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사운드가 어떻게 아이돌 음악 안까지 들어오게 됐을까.
K-pop에서는 언제부터였나
늘 새로운 시도를 선보여온 레드벨벳에게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2016년 발표된 ‘Russian Roulette’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하이퍼팝과 맞닿은 요소를 상당수 품고 있다.
도입부터 귀를 잡아끄는 신스와 디지털화된 보컬 프로세싱, 통통 튀는 복고풍의 8비트 사운드까지. 지금 들어도 꽤 과감한 프로덕션이다.
다만 이를 하이퍼팝의 시작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당시에는 일렉트로팝과 신스팝의 영향이 더욱 강했고, 지금처럼 해당 장르를 하나의 흐름으로 인식하지도 않았다. 지금의 하이퍼팝 열풍을 생각하면 시초라기보다는 하나의 전조에 가깝다.
컨셉의 보조바퀴
이후 2020년대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주요 엔터테인먼트사들이 낯선 사운드를 조금씩 아이돌 음악에 끌어오기 시작한 것. 특히 앨범 수록곡을 통해 새로운 장르를 실험하는 경우도 늘었다.
그중 에스파는 이 흐름을 타이틀곡까지 적극적으로 확장했다. 강렬하고 실험적인 사운드를 팀의 정체성으로 내세우며 기존 팝의 문법에서 벗어난 음악을 선보였다.
첫번째 미니앨범의 타이틀 ‘Savege’가 대표적이다. 공격적인 전자음과 왜곡된 보컬, 장르를 자유롭게 오가는 구성은 하이퍼팝의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미래적인 세계관의 차갑고 인공적인 질감까지 더해지며 에스파만의 독특한 음악적 색깔을 만들어냈다.

2026, 본격적인 확산
그리고 2026년. 이제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더 이상 강렬한 컨셉을 내세우는 일부 그룹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하이퍼팝의 문법을 차용한 사운드가 다양한 아이돌의 음악 안으로 스며들고 있다.
이제 그 변화는 걸그룹의 트랙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걸그룹 하이퍼팝 대첩 시작
그동안 ‘이것도 하이퍼팝인가?’ 싶었던 곡들이 있었다면, 최근에는 듣는 순간 그 성격을 직관적으로 알아챌 수 있는 트랙들이 등장하고 있다.
먼저 아일릿의 ‘Paw, Paw’. 시작부터 강렬한 전자음과 변형된 보컬이 몰아치며 기존의 아일릿 음악과도 다른 인상을 남긴다. 처음에는 다소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오히려 그 낯선 사운드가 곡의 가장 큰 개성이 된다. 귀여운 가사와 도전적인 프로덕션의 대비 역시 인상적이다.
최근 발표된 에스파의 정규 2집 [Lemonade] 수록곡 ‘Camouflage’와 키키의 미니 3집 [Why KiiiKiii]의 ‘Candy Pink Magic Hole Flip Phone (나 어떡해)’에서도 비슷한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글리치 사운드, 전자 비트와 함께 사용된 신스와 변형된 보컬. 과거에는 실험적으로 느껴졌던 요소들이 이제는 K-pop 안에서 하나의 익숙한 선택지가 되고 있다.
특히 Y2K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키키의 이번 앨범과 하이퍼팝의 조합은 꽤 절묘하다. 수록곡 ‘Ever 2 Late’와 ‘Candy Pink Magic Hole Flip Phone (나 어떡해)’의 비디오 클립에서는 2000년대 인터넷 문화와 프루티거 에어로 특유의 시각적 이미지가 겹쳐진다. 음악뿐 아니라 비주얼까지 맞물리면서 하이퍼팝이 가진 서브컬처적 감각을 보다 친숙하게 전달한다.

하이퍼팝, 이제 어디까지 갈까
하이퍼팝은 더 이상 일부 마니아만의 음악으로 머물지 않는 듯하다. 한때는 지나치게 인공적이고 시끄럽다는 이유로 대중적인 팝과 거리가 멀었던 사운드가 이제는 아이돌의 타이틀곡과 수록곡, 뮤직비디오와 스타일링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어쩌면 지금은 완성된 유행보다 시작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해외에서 먼저 형성된 사운드가 에피와 찰리 XCX를 거쳐 국내 대중에게 익숙해지고, 다시 K-pop 제작자들의 방식으로 재해석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목소리를 일부러 낯설게 만들고, 매끈한 팝에 노이즈를 끼얹고, 과거의 인터넷 문화를 다시 꺼내 현재의 감각으로 바꾸는 하이퍼팝.
이제 정말 K-pop 한가운데까지 와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