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 세상이 ‘레몬’으로 물들었다. 뷰티·패션 업계는 레몬 컬러 제품을, F&B 업계는 레몬을 활용한 신메뉴를 앞다퉈 선보이고 있다. K팝도 예외는 아니다. SM엔터테인먼트는 가장 먼저 레몬을 전면에 내세웠다. 에스파는 정규 2집 [Lemonade], 하츠투하츠는 미니 2집 [Lemon Tang]으로 비슷한 시기에 컴백을 알렸다.
처음에는 우려의 시선도 있었다. 같은 소속사에서 비슷한 키워드를 연이어 내세운 데다, 최근 하이브 소속 르세라핌, 캣츠아이, 아일릿이 잇따라 테크노 사운드를 선보이며 각 그룹의 개성이 희미해졌다는 반응이 나왔던 터. 이 때문에 ‘레몬’이라는 공통된 컨셉이 자칫 그룹 간 차별성을 흐릴 수 있다는 우려가 뒤따랐다.

하지만 [Lemon Tang]이 공개된 뒤 분위기는 달라졌다. 같은 ‘레몬’을 내세웠지만, 두 그룹이 풀어낸 방식은 전혀 달랐다. 오히려 서로 다른 접근이 ‘레몬’이라는 키워드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프로모션부터 차이가 뚜렷했다. 에스파는 레몬 하이볼, 레몬 디저트 콜라보처럼 ‘가공’된 레몬을 활용했다. 반면 하츠투하츠는 레몬 모양 열기구, 레몬이 가득 담긴 족욕탕 등 레몬의 ‘원형’에 초점을 맞췄다. 에스파의 [Lemonade]가 ‘인생이 레몬을 준다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라는 영어권 속담에서 기획됐다는 점을 떠올리면 더욱 흥미롭다.
음악도 달랐다. 맑은 음색과 동요 같은 분위기의 ‘Lemon Tang’은 에스파보다 직관적으로 레몬을 활용했다.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두 앨범은 같은 소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며 각자의 색을 보여줬다. 리스너들은 두가지 스타일의 레몬을 맛볼 수 있게 되었고, 두 그룹에게는 실보단 득이었다.
그렇다면 SM의 이런 마케팅은 이번이 처음이었을까?
2년 전에도 똑같았다

레몬 이전에는 ‘건담’이 있었다.
NCT WISH의 싱글 2집 [Songbird]와 웬디의 미니 2집 [Wish You Hell] 컨셉 포토에는 건담을 활용한 소품이 등장한다. 건담으로 만든 새와 곰인형처럼, 모두에게 친숙한 소재를 각 앨범의 분위기에 맞게 재구성한 점이 인상적이다.

이틀 뒤 공개된 에스파의 일본 데뷔 싱글 [Hot Mess]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뮤직비디오 속 멤버들은 건담으로 변신해 도시 일대를 휩쓴다. 멤버마다 다른 컬러와 레퍼런스가 된 건담 모델을 설정해 팬들에게 또 다른 재미를 전했다.
애니메이션을 컨셉으로 활용한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반 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같은 회사가 ‘건담’이라는 하나의 소재를 서로 다른 컨셉의 아티스트에게 풀어낸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혹시 체리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비슷한 흐름을 2016~2017년에도 찾아볼 수 있다.
그 해 대표적인 키워드는 ‘체리’였다. 레드벨벳의 미니 3집 [Russian Roulette] 티저에는 체리와 곳곳에 붉은 하트가 등장했고, 멤버 예리는 체리색 머리로 활동했다. 팬들은 새로운 세계관을 암시하는 장치라고 추측했지만, 발매되고 보니 체리는 단순하게 사용된 이미지에 가까웠다.
이후 NCT 127의 미니 3집 [CHERRY BOMB]에서 체리는 비로소 앨범의 중심 소재가 됐다.
레트로의 2016년

비슷한 시기 앨범 아트워크도 닮아 있었다. 강렬한 원색과 키치한 2D 그래픽이 사용된 앨범들. 샤이니의 [1 of 1], 루나의 [Free Somebody], 엑소-첸백시의 [Hey Mama!]를 나란히 놓고 보면 공통된 무드가 분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음악까지 닮지는 않았다. 같은 비주얼 안에서도 각자의 색은 분명했다.
결국 이번 레몬도 같은 흐름이다.

SM엔터는 하나의 소재를 여러 아티스트에게 부여하면서도, 이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다. 같은 키워드를 반복하기보다 각 팀의 정체성에 맞게 다시 해석하는 것이다.
에스파와 하츠투하츠가 같은 레몬으로 서로 다른 분위기를 만들었듯, 건담도, 체리도 같은 방식으로 활용됐다. 과거 ‘광야’ 세계관을 통해 여러 아티스트를 하나의 서사로 연결하려 했던 것처럼, 서로 다른 팀을 하나의 키워드 아래 엮는 것 역시 SM이 꾸준히 보여준 방식이다.
쇠맛의 레몬과 햇살 맛의 레몬을 동시에 선보인 것처럼. 앞으로도 SM은 하나의 소재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하는 마케팅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