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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였구나, 경성 예술가들의 아지트

90년 전 그들은 매일같이 이곳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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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경성 소공동. 이곳엔 문학인들이 매일 같이 드나들던 아지트가 있었다. 지금의 서울시청 맞은편에 자리했던 다방, ‘낙랑파라’.

시인-남자-카페

이름부터 기묘하다. 고구려에 함락당한 ‘낙랑’과 응접실을 뜻하는 영단어 ‘Parlour’의 일본식 발음 ‘파라’가 합쳐진 것인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이 낯설다. 하지만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해가 된다. 1920년대부터 낙랑 지역(지금의 평양 일대)에서 유물들이 대거 발견되면서, ‘낙랑’이 당시 대중들에게 뜨거운 화젯거리였기 때문. 실제로 낙랑파라 내부 곳곳에는 낙랑의 유물들을 연상케하는 디테일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의 과거와 서구 문화가 합쳐진, 그야말로 독특한 신식 다방이었던 것.

당시 사람들은 다방에 가는 것을 ‘타락한 행동’이라고 여겼지만, 낙랑파라는 그에 해당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담화를 나누는 것이 고상하다 여겨졌다. 일반 다방과는 다른 낙랑파라의 특별함은 무엇이었을까. 

건물-카페

낙랑파라를 차린 인물은 동경미술학교 출신의 공예가 이순석. 1946년 서울대 미대 교수로 부임해 1970년 정년퇴임까지 수많은 후학을 양성한 한국 현대 공예의 선구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졸업 후 광고 일을 하다 1년 만에 관두고 1932년에 다방을 개업했다. 당시 덕수궁 박물관을 수시로 드나들며 공예 공부를 했는데, 근처에 화실 겸 카페를 낸 것. 실제로 2층은 개인 작업실로 사용하고, 1층은 다방으로 운영했다. 

카페-다방

그는 사람들이 지식을 공유하고 토론도 하는 유럽의 살롱 문화를 조선에도 들이고자 했다. 당시 내부 사진을 보면 지금 봐도 예사롭지 않은 인테리어를 확인할 수 있다. 등나무 의자와 테이블 등 수입 가구와 야자수까지. 당시 일본과 유럽의 고급 호텔이나 카페에서 사용할법한 아이템으로 가득했다. 클래식부터 재즈까지 다양한 서양 음악이 흘러나왔고, 커피와 케이크를 제공했다. 

낙랑파라는 단순한 커피집이 아니었다. 이렇다 할 개인 서재를 갖출 수 없었던 일제강점기, 문학인들이 편하게 방문해 원고를 작성하고 함께 의견을 나누는 작업실이자 회의실이었다. 그곳엔 조용히 시상이나 소설을 구상하는 사람들, 노트나 원고지를 펼쳐 작품을 집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카페에서 작업하는 프리랜서인 셈. 또 네트워크 역할도 톡톡히 했다. 편집자, 시인, 화가 등 출판계 인맥을 만들어 투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만남의 장이기도 했다.

시인-예술가

단골 손님으로는 이상, 박태원, 구본웅, 이태준 등이 있었는데. 낙랑파라 뒤에 화가 구본웅이 운영하는 골동품점이 있어서 그의 절친 이상, 박태원, 그리고 이태준 등이 자주 방문했다. 특히 이상은 거의 매일 이곳을 찾았다. 심지어 자신이 차린 ‘제비다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낙랑파라를 더 많이 찾았다. 이곳에는 언제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고, 온갖 서양 영화 잡지와 음악이 있었다. 

시인-남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쓴 박태원이 이상과 늘 만났던 곳도 낙랑파라였다. 이곳을 작업실 삼으며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만큼 소설 속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덕분에 내부 분위기를 꽤 자세히 알 수 있다. 

“다방의 오후 2시, 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 등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고, 또 레코드를 들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는데.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기네들은 인생이 피로한 것같이 느꼈다.”

이상이 소설 속에 그린 삽화를 통해서도 그 내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삽화-그림

이순석은 당시 국민들에게 사랑받던 영화배우 김연실을 낙랑파라의 마담으로 고용했다. 사람들이 다방을 선택하는 중요한 요소였던 만큼 심혈을 기울인 것. 몇 년 뒤 그는 낙랑파라의 경영권을 김연실에게 넘겨줬고, 그녀는 다방 이름을 ‘낙랑’으로 바꿨다.

1940년대까지 예술가들의 핫플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던 낙랑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 문을 닫았다. 일제 말기 김연실은 만주에서 생활하다 해방 후 서울로 돌아와 다시 낙랑의 문을 열었는데. 과거의 단골들은 자신들의 아지트가 되살아나자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얼마 뒤 6·25 전쟁이 터지고 김연실이 북한으로 가게 되면서 낙랑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건물-카페

식민지 조선의 현실 속, 문학인들의 고뇌와 열정 그리고 낭만이 서려있던 낙랑파라. 그곳은 당시 예술가들의 안식처이자 창작의 산실이었다. 이후 종로 일대에는 수많은 다방이 생겨났지만, 낙랑파라처럼 예술가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창작을 하는 공간은 드물었다.

연남동에는 낙랑파라를 모티프 삼아 2014년에 문을 연 동명의 카페가 있다. 현대인에게 작은 위안과 영감을 줄 수 있는 골목의 오아시스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2층으로 구성된 내부에는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기다란 테이블부터 혼자 앉기 좋은 테이블까지 다양한 자리가 있다. 따뜻한 우드톤 인테리어에 넓고 아늑한 공간. 모임과 작업을 하기에 제격이다. 새로운 영감이 필요한 당신, 낙랑파라를 매일같이 드나들던 예술가들의 혼을 이어받은 연남동의 낙랑파라를 방문해 보라. 혹시 모르지 않는가, 당신의 소중한 아지트가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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