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AI.’
SNS에서 판을 치는 AI 생성 이미지에 피로감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 제대로 판을 키운 사람이 있다.
정통 패션의 규칙을 깨다

프랑스 디자이너 알렉시 마빌은 이번 파리 패션 위크에서 실제 의상과 모델 없이 오직 AI로만 쇼를 선보였다.
쇼에 참석한 사람들은 30미터 길이의 공간을 감싸는 대형 스크린을 마주 보고 앉았다.
조명이 어두워지자 스크린에는 가상의 관객들이 나타났고, 뒤이어 컬렉션 의상을 착용한 모델들의 워킹 장면이 반복 재생됐다.



쇼에 초청받은 관객들의 눈앞에는 자신들처럼 두 줄로 앉아서, 워킹하는 모델을 촬영하는 가짜 관객이 있었다.
길게 늘어져있던 진짜 런웨이에는 그 누구도 오르지 않았다.
이날 관객들이 본 건, 스크린 속 영상이 전부였다.

“정성을 쏟았습니다”
알렉시는 AI 스튜디오와 5개월간 협업하며 이번 컬렉션을 완성했는데. 원하는 형태와 효과를 구현하기 위해 300번의 테스트를 거친 의상도 있었다. 수없이 많은 시도를 거쳐 소재의 광택감, 주얼리의 반짝임, 오묘한 색감까지 정밀하게 구현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진정한 오트 쿠튀르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강한 의문이 생긴다.
기존의 규칙을 깨는 알렉시의 시도에 참신하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회의적인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AI로 만든 작업물은 오트 쿠튀르로 볼 수 없기에 패션 위크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는 것.

‘오트 쿠튀르’. 숙련된 장인들이 소수의 고객을 위해 100% 수작업으로 만든 최상급 맞춤 패션을 뜻한다.
파리 의상 조합의 엄격한 기준을 충족한 하우스만이 ‘오트 쿠튀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는데. 조합 측은 당연히 알렉시의 시도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

알렉시는 파리 명문 패션 대학을 조기 졸업한 수재였다.
디올, 입생로랑 등 다양한 하우스에서 경험을 쌓은 뒤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
20년 경력의 베테랑 디자이너는 어쩌다 AI 컬렉션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쿠튀르는 실험의 장이다”
알렉시는 이번 시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끊임없이 재창조하는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가 이번 실험을 통해 미지의 창조 영역을 새롭게 제시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의를 놓고 따져봤을 때, 그의 작업물은 명백히 오트 쿠튀르가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다.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었다는 것과 별개로, 그들의 손으로 만든 건 ‘옷’이 아니라 ‘영상’이었다.

대체되거나, 리드하거나
그가 보여준 AI 컬렉션은 앞으로 패션계에 펼쳐질 미래를 상상하게 만든다.
또 어떤 대담한 시도들이 우리를 놀라게 만들지 기대가 되는 한편, 겁이 나기도 한다.
AI의 본질은 인간 노동력의 완전한 대체이기 때문.
대체되지 않기 위해, 디자이너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디자인의 진정한 의미는 창의성이나 심미성의 차원을 넘어, 브랜드가 지향하는 미래 가치를 실현하는 데에 있다. 그것은 정형화된 기존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각각의 브랜드가 직면한 문제를 완벽히 해결할 수 없기 때문.
따라서 기본적인 디자인 역량에만 충실한 디자이너는 AI에 대체될 가능성이 크다. 디자이너는 이제, 브랜드 전략 기획자로서의 역할도 해야 한다. AI는 가지지 못할 ‘브랜드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앞으로 디자이너가 가져야 할 핵심 역량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