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변했다. 좋아요와 관심만으로 돈을 버는 세상이 도래했다. 2026년을 기점으로 ‘인플루언서’는 공식 직업으로 인정됐다.
20여 년 전에도 인플루언서가 있었다. 시대를 앞서간 셀프 브랜딩으로 당대 미국인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던 패리스 힐튼의 이야기다.

2000년대 초반 SNS가 보편화되지 않던 때, 패리스 위트니 힐튼이 세상에 등장했다. 지금 인플루언서들에게는 인스타그램이라는 매체가 있지만, 그 시절 그녀는 별다른 플랫폼도, 전례도 없는 환경 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세간의 이목을 받으며 시대를 대표하는 셀럽의 경지까지 단숨에 올랐다. 대중의 시선을 끄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 그녀는 영리했다.

다들 나보고 네포베이비래
패리스 힐튼은 대표적인 네포티즘 베이비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힐튼 호텔 명문가의 손녀딸로, 소위 말하는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 허나 시대를 앞서 자신을 완벽하게 브랜딩한 그녀를 표현하기에 네포베이비라는 타이틀은 적절하지 않다.
정통 상류층의 보수적인 부모 밑에서 자라온 그녀는 가문의 궤와는 다른 삶을 원했다. 어린 시절 패리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패션모델. 과감하고 전위적인 패션 스타일에 이끌려 그녀는 학창 시절부터 모델처럼 꾸미고, 입고, 놀았다.
사진작가 데이비드 라샤펠과의 만남은 그녀를 처음 세상 밖으로 내놓았다. 그의 카메라에 담긴 패리스 사진은 2000년 미국 유명 잡지사 베니티 페어에 실렸고, 그녀는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녀는 유명해지기 위해선 모든 일을 한다” – 베니티 페어

최초의 부캐는 여기서 탄생했다
2003년, 패리스는 리얼리티 쇼의 주인공으로 대중 앞에 섰다. 상류층 사회를 떠나 시골 생활을 체험하는 재벌가 자녀들을 담은 예능 프로그램 <The Simple Life>. 세상 물정에 어두운 소녀가 서민 생활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는 내용을 그린 리얼리티는 그녀에게 ‘백치미’라는 수식어를 부여했다.
상류층 문화를 풍자하는 프로그램이라니. 당시 미국인들의 정서를 정확히 간파한 콘텐츠였다. 두말할 것 없이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그녀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너희가 원하는 거, 정확히 파악했어
바보 같지만 해맑은 소녀. 그녀는 이 캐릭터가 대중에게 엄청나게 먹히는 소재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그때부터 금발 머리, 바비인형에 나올법한 공주 드레스, 가짜 목소리와 바보 흉내로 점철된 이미지메이킹이 시작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부캐’ 혹은 ‘기믹’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SNS가 없던 시절, 그녀가 선택한 수단은 파파라치와 주변인들이었다. 일부러 멍청해 보이도록 큰소리를 내며 드라이브 쓰루를 주문하는가 하면, 당시 절친이자 핫한 셀럽이었던 킴 카다시안이 자신의 비서라는 식의 농담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그야말로 온갖 권모술수를 다 써가며 ‘사랑스러운 백치미’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유명세가 유명세를 낳는다
인기가 절정을 찍던 무렵, 패리스 힐튼은 사업 시장에 뛰어들었다. 2004년 자신의 이름을 딴 향수를 포함해 30여 종의 향수 라인을 대거 출시했다. 바비인형을 연상케 하는 깜찍한 패키징의 향수는 그녀의 시그니처 이미지를 그대로 담아냈고, 전 세계에서 기록적인 판매량을 올렸다.
그녀는 이 기세를 몰아 패션, 뷰티, 액세서리 등 다양한 장르의 사업에 발을 들였다. DJ 활동, 앨범 발매까지 발을 넓히며 분야를 막론하고 사랑받았다.

사실 다 거짓이었어요
2020년, 패리스는 다큐멘터리 <This is Paris>에 출연해 ‘멍청한 금발 페르소나’는 전부 가상의 이미지였음을 밝힌다. 20년 가까이 대중이 지켜봐왔던 그녀의 모습은 철저하게 설계된 캐릭터였던 셈이다. 자신의 본모습은 전혀 다르다는 말도 함께 털어놓았다.
그녀가 가장 성공적으로 브랜딩한 대상은 향수도, 패션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이후 패리스 힐튼은 셀러브리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한 인물로 재평가되었다.
스스로가 곧 브랜드이자 콘텐츠가 되어 세간의 시선을 독식했던 그녀. 오늘날 우리가 소비하는 인플루언서의 기틀은 수십 년 전 그녀가 증명해낸 산물이다.
몇 수 앞을 내다보며 누구보다 먼저 시대를 읽어낸 패리스 힐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