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없었으면 우리는 우리가 아니었다”

데이비드 보위, 이기 팝, 토킹 헤즈, 콜드플레이.
모두 다른 시대, 다른 장르의 슈퍼스타들이 입을 모아 공을 돌리는 한 남자가 있다. 주인공은 브라이언 이노. ‘뮤지션들의 뮤지션’이라 불리는 그는 올해 79세로, 앰비언트 음악의 창시자다.

이노는 스스로를 ‘비음악가’라고 규정한다. 예술을 결과물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으로 여기기 때문. 이러한 가치관은 그의 독특한 작업 방식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1976년 그는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적 정점이라 평가받는 ‘베를린 3부작’을 공동 제작했다. 당시 슬럼프를 겪고 있던 보위에게 그가 건넨 것은 몇 장의 카드. 그 위엔 직접 간단한 지시문을 적었고, 보위는 자신이 뽑은 카드의 내용을 따라가며 게임처럼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노는 방향성을 잃고 방황하던 보위를 살렸다.

이후 다른 아티스트들과의 작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콜드플레이에게는 최면술사에게 최면이 걸린 채로 연주해 보자고 제안했다. 그는 정답을 찾고 있는 아티스트에게 음악으로 해답을 주지 않았다. 아티스트들이 너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길을 헤매고 있을 때 그저 마음 놓고 놀 수 있게 해줬을 뿐. “예술은 놀이야. 안 되면 다시 하면 돼.”
그리고 최근, 자신의 50년 프로듀서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해 출판했다.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

이노는 책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 한 소녀와의 일화를 소개했다.
“저는 미술을 정말 좋아해서 하고 싶은데, 선생님은 제가 너무 똑똑해서 미술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어요”
교사의 말에 좌절한 소녀를 보며 인류의 역사에서 늘 함께 했던 예술이 핀테크나 컴퓨터 프로그래밍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현대사회가 ‘문화의 죽음’이라고 느끼며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책을 쓰게 된 것.
이노는 특히 AI 시대일수록 예술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고 말한다. 과학이 세상을 발견한다면, 예술은 그 발견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

장식이 없는 단순한 항아리도 필요한 기능을 해내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수천 년에 걸쳐 복잡한 모양과 형태를 가진 항아리를 만들어 왔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티셔츠도 기능 면에서는 하자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림이나 무늬가 있는 티셔츠를 좋아한다. 우리는 왜 기능과 상관없는 예술 활동에 시간을 쓰는 걸까? 답은 단순하다.
예술은 감정을 촉발시킨다

예술의 가장 큰 역할은 ‘감정의 시뮬레이터’다. 우리는 소설과 영화를 통해 사랑과 상실을 경험하고, 진짜 다른 사람이 되지 않고도 잠시 다른 사람이 되어볼 수 있다. 현실에서의 위험 없이 수많은 감정을 경험하게 해주는 게 바로 예술이라는 것. 즉 예술은 인간이 감정을 연습하는 가장 오래된 기술인 셈이다.

이노는 옷을 고르는 일, 농담을 만들고 밈을 공유하는 일,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일까지도 예술의 범주 안에 놓는다. 우리는 헤어스타일을 통해 자신을 표현해 주는 일종의 대리인을 만들어낸다. 남성적/여성적, 클래식/트렌디. 수많은 스타일 사이에서 나만의 취향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 줬으면 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낸다. 타인이 나를 볼 때 느꼈으면 하는 감정을 시각적 요소로 표현하는 예술에 해당한다.
예술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무엇을 보거나 듣는 순간 그 자리에서 하던 일을 멈춘 경험.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무언가에 압도되고 홀린 듯한 느낌, 그리고 그것을 계속 경험하고 싶은 느낌. 자신이 무엇인가를 정말로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발견하고 나면, 그것을 길잡이 삼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자아실현의 핵심적인 부분은 자신이 얕게 좋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하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느껴 보고 싶은 감정의 종류를 섭렵해 보고, 어디서 자신이 좋아하는 감정을 얻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즉, 예술은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다.

예술가가 글, 그림, 노래를 만들어내는 것도 자신의 세상으로 우리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다. 예술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감정과 경험을 공유하게 만드는 사회적 언어인 셈. 사람들은 예술로 연결되고, 공동체를 만든다. 그리고 이는 곧 세계를 변화시키고 역사의 한 축을 만들어낸다.
이노가 말하는 예술은 거창하지 않다. ‘놀이와 감정’. 그뿐이다. 우리 모두는 이미 일상에서 예술과 함께 하고 있으며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창조하고 있다. 내 안에 숨어있는 작은 예술가를 만나고 싶은 당신, 지금 바로 가까운 서점에서 그의 신간을 확인해 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