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더 이상 ‘옷 자체’만 보고 지갑을 열지 않는다. 대신 그 옷이 가진 이미지와 환상을 소비한다. 패러다임이 변했고, 옷에 스토리를 부여하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스타일리스트’의 역할이 커졌다. 이들은 더 이상 디자이너 뒤에서 움직이는 ‘보조적 존재’가 아닌, 소비를 이끌어내는 ‘결정적 존재’로 역할한다.
디자이너와 스타일리스트. 두 직업 간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그리고 여기, 그 경계선을 누구보다 자유롭게 넘나들며 독보적인 커리어를 보여주는 한 인물이 있다.

로타 볼코바는 198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알렉산더 맥퀸과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즐겨 입던 어머니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쇼핑을 다니곤 했는데. 일찍이 로타의 창의성을 알아본 어머니는 그녀가 가문의 뒤를 이어 의학의 길을 걷는 대신 미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

그렇게 로타는 2001년 17세가 되던 해에 혼자 런던으로 이주했고,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에 입학해 순수미술과 사진을 배웠다. 이 시기 그녀는 런던의 언더그라운드 클럽 문화에 푹 빠져 살았는데. 친구들과 놀러갈 때 입는 옷을 바탕으로 DIY 브랜드 ‘로타 스켈레트릭스’를 런칭했다. 스터드 장식 티셔츠와 찢어진 청바지 등 펑크 감성이 다분한 디자인이었다.
어딜 가나 눈에 띄었던 로타의 패션은 우연히 마주친 레이 가와쿠보의 마음까지 사로잡았고, 그녀의 브랜드 ‘로타 스켈레트릭스’는 도버 스트리트 마켓의 한쪽 구석을 차지했다.

2007년 파리로 이주한 로타는 한 파티에서 뎀나 바잘리아를 만나 친분을 쌓게 된다. 당시 마르지엘라와 루이비통에서 경력을 쌓은 뎀나는 로타 볼코바와 고샤 루브친스키 등 구소련 출신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2014년 ‘베트멍’을 런칭했다.


로타는 뎀나와 함께 브랜드 컨설팅을 하며 스타일링은 물론 캐스팅 디렉터, 모델까지 도맡았다. 뎀나 특유의 실험적인 디자인은 이때부터 시작됐는데. 2016 S/S 쇼 오프닝에서 고샤 루브친스키가 입고 등장한 ‘DHL 로고가 박힌 티셔츠’는 공개되자마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기성 세대를 조롱하듯, 베트멍은 ‘럭셔리’의 개념을 뒤흔들었다. 패션에서 중요한 것은 돈이나 지위가 아닌 ‘태도’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리고 그 아이디어는 대부분 로타의 것이었다.

상류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하우스 브랜드에 하위문화를 섞는 것이 로타의 특기였다. 한 인터뷰에서 그녀가 말했다. ‘패션에 위계는 없다’고. 그녀는 하우스 브랜드의 정통성을 이어나가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대신 마음껏 가지고 놀며 독특한 서사를 만들었고, 기존 관념을 깨부시며 브랜드 정체성을 새롭게 각인시켰다. 구소련 시대의 혼란, 2000년대 초반의 클럽 문화. 어린 시절 보고 자랐던 모든 경험이 영감의 원천이었다.

2015년 뎀나가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었을 때 역시 로타는 그와 함께 했다. 둘은 오랜 파트너십을 이어갔고, 뎀나의 언더그라운드 감성이 담긴 브랜드가 만들어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로타는 ‘스타일리스트’ 그 이상의 명성으로 패션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2020년, 그녀는 미우미우의 스타일리스트 겸 컨설턴트로 합류하면서 커리어의 정점를 찍게 된다.

알프스 산맥의 설원을 배경으로 한 2021 F/W 캠페인은 단숨에 바이럴을 일으키며 MZ 세대에게 ‘새로운 미우미우’를 각인시켰다.

2022 S/S 컬렉션 속 ‘마이크로 미니 스커트’도 빼놓을 수 없다. 골반 뼈가 드러나는 로우 라이즈에 극단적으로 짧은 기장. 상당히 실험적인 디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되자마자 인터넷을 강타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끈 데에는 로타의 스타일링 덕이 컸다.
극도로 노출이 심한 옷을 ‘단정함’의 정수인 프레피 룩으로 연출한 것인데. 긴 양말과 페니 로퍼는 갖춰 신었지만 크롭 톱과 스커트의 끝단은 마감 처리되지 않아 실밥이 여기저기 풀려있는 모습이었다. 발랑 까진 것 같아 보이지만 또 고급스러워 보이기도 한, 언발란스함이 주는 묘한 매력으로 프레피 룩의 전형성을 비틀었다.

로타는 자신의 무기인 위트와 반전으로 기존의 미우미우에 ‘발칙함’을 더해나갔다. 소녀의 이면에 숨겨진 관능과 반항심을 꺼내 적용시킨 것. 올바르고 단정한 모범생 소녀보다는 조금은 기이하고 대범한 시도를 즐기는, 여자들이 갈망하는 지점을 정확히 간파한 그녀의 전략은 늘 성공적이었다.
프라다의 동생 급으로 여겨지던 미우미우는 로타의 합류 이후 제대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2024년 4분기에는 전년 동기 대비 82%의 매출 상승을 기록하며 현재까지 상승세를 이어오고 있다. 로타는 여전히 미우미우와 동행하고 있으며 현재 생 로랑, 페레가모 등 여러 브랜드의 스타일링 작업 또한 진행하고 있다.

“더 이상 발견할만한 서브컬쳐는 없어요. 중요한 건 정보를 리믹스하는 거죠”
로타, 그녀를 단순히 ‘스타일리스트’라고 칭할 수 있을까?
그녀는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의 정의를 새롭게 썼다. ‘신선함’을 느끼기 어려워진 현대사회. 서로 상충되는 요소를 조합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녀의 스토리텔링 방식은 앞으로 ‘스타일리스트’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될 것이다.





